[그 후 50년, 여기 다시 전태일들]
1부. 2020년, 무엇이 달라졌나
①여전한 노동, 고단한 삶
1부. 2020년, 무엇이 달라졌나
①여전한 노동, 고단한 삶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몸 불살랐던 전태일의 외침
하루 16시간 일하다 피를 토하던 여공과
하루 16시간 일하다 쓰러지는 택배 노동자들…
2020년, 우린 얼마나 달라졌을까
서울 청계천에 있는 한 봉제공장의 모습.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제공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봉제공장 재단사로 일하던 22살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2만여명이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이었고,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전태일이 쓴 탄원서)이었다. 이들은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했다. 전태일은 노동청과 서울시청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이런 부조리를 고발했지만, “한달에 이틀 쉬면서 일주일에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리”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여공들은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과 폐결핵”에 시달렸다. 전태일 분신 이후 한국 사회는 조금씩 소외된 노동 현장을 살피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0년, 전태일 외에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주변부 노동자들의 삶은 달라졌을까. 얼마나 달라졌을까.
1975년 서울 평화시장 봉제공장(왼쪽 사진)과 최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공장(오른쪽 사진)의 모습.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50년이 흘렀지만 풍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고 노동자들의 주름살만 더 깊어졌다.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여전히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4살 ‘시다’에서 57살 학교 급식 노동자로 1977년, 14살이던 김영순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터에 나갔다. 밥을 굶을 형편까진 아니었는데 “딱히 학교를 더 다니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서울 동부이촌동에 있는 개인 의상실에 취직했다. 김영순이 처음 얻은 직업은 ‘카렌스 의상샵 시다’였다. 부자 동네의 고급스러운 옷집 일은 어렵지 않았다. “선생님이 피팅할 때 핀 잡아주고 심부름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해 겨울, 첫 월급은 3만8천원이었다. 의상실에서 모시던 “선생님이 예쁘게 봐주어” 명동에 있는 노라노 의상샵으로 옮겼다. 당대 최고의 의상실이었다. 1명의 선생님 밑에 6명의 ‘시다’가 일하는 구조였는데, 일이 만만치 않았다. 야근이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시장에서 일하면 오후 6시에 딱 끝나고 월급도 1만원 더 준다”는 친구의 말에 혹했다. 의상실에서 봉제공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시다’의 삶이 시작됐다. 김영순이 평화시장 2층 다락방 봉제공장에 처음 들어선 시기는 전태일이 분신한 지 7년이 지난 뒤였다. 분신 이후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야학을 만들고 공단에 위장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전태일이 죽음으로 읍소했던 노동 환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뿌연 먼지로 가득한 공간에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소음이 김영순을 덮쳤다. 다다미 바닥 위 재봉틀은 소란을 멈추지 못했다. ‘이처럼 작은 공간에 이렇게 사람들이 빡빡하게 서서 부딪히지 않고 일할 수도 있구나’라고 떠올렸던 그때 그 생각이 43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김영순은 말했다.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마네킹에 화려한 옷을 입히던 소녀”는 그렇게 66㎡(20평) 남짓한 공간에 25명이 부대끼며 일하는 봉제공장의 ‘10대 여공’이 됐다. 악 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바빴다. 교복 자율화 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은 점차 소비에 눈뜨고 있었다. “팔다리만 제대로 달려 있으면 옷을 집어가던 시절”이었다. 미싱사 ‘오야’ 언니들이 박카스랑 같이 먹으라며 ‘영양제’를 줬다. 몇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영양제가 ‘타이밍’이라고 불리는 각성제라는 걸 알았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던 시절이었지만 현장은 별나라였어요. 근로기준법에 마약류 투입 금지 같은 조항이 있었겠어요? 그땐 다 그렇게 일했죠.” 김영순은 그렇게 몇년 동안 더 ‘타이밍’을 먹고 잠을 뿌리치며 ‘오야’ 언니들이 집어던진 일감을 수습하고, 옷의 라인을 잡고, 재단된 옷을 넘겼다. “참을 만했던 것인지, 참을 수 있었던 것인지, 겨우 참아냈던 것인지…, 이제 기억나지 않아요.” 김영순에게도 빛나던 시절의 기억이 있다. “교회에 공부하러 간다”던 친구를 따라 박형규 목사가 있던 제일교회에서 ‘야학’을 했던 때다. 한문과 세계사, 상식을 그때 처음 접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하던 언니들이 살던 창신동 보문동 방’을 강의실 삼아 노동법 관련 공부를 하면서 “이슬비에 옷 젖는 것처럼” 조금씩 생각도 바뀌었다. 손학규, 송영길, 김문수 같은 이들을 그때 ‘선생님’으로 처음 봤고, 위장 취업한 두살 위 대학생 오빠와 이른바 ‘노학연대’ 커플이 되어 결혼했다. 변두리 노동자들을 ‘학습’시키겠다며 현장에 ‘침투’했던 그때 그 오빠는 이제 사내 등산반 활동을 열심히 하는 “평범한 생활인”이 되어 위장 취업했던 그 회사에서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김영순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일들은 노동법을 공부하던 그 시절이나 전태일 분신 이후 50년 동안 일어난 굵직한 노동 관련 사건들이 아니었다. 청계천을 떠나 경력이 단절됐다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만든 출산이었고, 아이엠에프(IMF) 경제 위기였으며, 43년 사이 폭등한 부동산 가격이었고, 어느덧 훌쩍 자란 아이의 과외비였다. “43년 전에서 지금은 얼마나 멀리 왔을까요? 그때는 공장 위 다락방에서 언니들과 수다를 떠는 게 좋았고, 지금은 그때 어울리던 사람들과 함께 늙어가며 고단함을 견딜 뿐이에요.”
서울 종로구 창신동, 성북구 보문동, 동대문구 신설동 일대에서 일하는 봉제 노동자는 9만여명으로 추정된다. 40~5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시다’로 불리던 이들은 어느덧 ‘사장님’이 됐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고, 노동법 밖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은 변한 게 없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저녁 8시…“아직도 일이 남았다” 61살 이군표(가명)의 삶과 노동도 1970년대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 그는 서울 창신동에서 아내와 함께 가내수공업 봉제공장을 운영한다. 지난 13일 만난 이군표는 대뜸 “인터뷰가 오래 걸리느냐”고 물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아직 일이 남았다고 했다. 17살이던 1976년 신설동의 한 의상실에서 ‘시다’로 일하기 시작해 미싱사를 거쳐 가게와 공장을 겸하는 사장님이 되기까지 꼬박 44년이 걸렸다. 하지만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아, 그나마 일하는 곳에 창문이 생긴 게 달라졌네요.”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는 창신동 일대에만 이군표와 같은 이가 9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 전역에는 30여만명의 봉제 노동자가 있다. 자영업자인지, 노동자인지 경계도 모호하고 구분도 쉽지 않다. 전태일 분신 50년이 지났지만 이런 봉제 노동자들은 여전히 법 주변부 어딘가로 밀려나 있다. 2019년 대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조사한 봉제 노동자 실태를 보면, 봉제 노동자 가운데 근로계약서를 작성해봤다는 이는 14%에 그쳤다. <한겨레>가 1970년대부터 종로와 동대문 일대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던 노동자 5명을 만나 물어봤을 때도, 모두 “근로계약서는 단 한번도 작성해보지 못했고 본 적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4대 보험이나 근무 시간 준수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봉제 노동자는 어떤 노동 이력도 입증할 수 없는 유령 노동자들이에요. 그렇다 보니 코로나 재난 지원금 같은 것도 전 국민한테 준 거 외엔 아무것도 받지 못했죠. 그나마 국민이라는 데 감사해야겠지요.” 서울봉제인지회 회장 이정기의 말이다.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밭뙈기 하나 없는 집에서 동생만 셋을 둔 장남”으로 태어난 이군표는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이천 읍내 양복점에서 잡일을 시작했다. 가게에서 먹고 자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옷감을 나르고 또 날랐다. 몇년이 지나 겨우 재단판 앞에 설 수 있었는데, “단춧구멍만큼 작은 눈을 종일 부릅뜨고 옷감과 사투를 벌였다”며 웃었다. 그렇게 받은 월급 3만5천원이 온 가족 생계비였다. 이군표의 바지런함과 솜씨를 눈여겨본 고향 선배의 추천으로 서울 신설동의 한 의상실을 소개받은 게 1976년이었다. ‘오야’ 혹은 ‘선생님’이라고 불리던 미싱사 한명 아래 패턴사, 손바느질하는 사람, 패턴 뜨는 사람, 심부름하는 사람까지 다섯명이 한 조가 되어서 일했다. 눈뜨면 일을 시작했고, 일을 마치면 바로 잠들던 시절을 보냈다. 남은 건 관절염과 위장병이었다.
전태일 열사(뒷줄 가운데)가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갓 취직했을 때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옷 한벌 공임, 32년째 내리막길 청계피복노조가 임금 인상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싸우던 1980년, 21살 이군표는 처음 ‘오야’가 되어 월급 35만원을 받았다. 열심히 하면 “이름 내건 의상실도 열고, 패션업계 사장님”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태일 분신 직후 결성된 청계피복노조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18년 싸움 끝에 합법성을 쟁취한 1988년, 이군표에게도 전성기가 왔다. 옷 한벌을 만들면 7000~7500원을 받던 시절이라 신나게 일했지만, 모든 것은 1997년 외환위기가 오면서 마른 잎처럼 바스러졌다. 패션 산업은 거대한 구조조정을 거쳤고,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공장들은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서둘러 떠났다. 패션산업의 주 무대가 명동에서 이대 앞으로, 홍대 앞에서 강남으로 바뀔 때마다 ‘선생님’으로 불리던 봉제 기술자들의 지위는 더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전성기’ 이후 꼬박 30여년이 흘렀지만, 요즘도 아내와 함께 옷을 만들면 한벌당 1만7천원을 받는다. 32년 동안 치솟았던 물가와 비교하면, 숙련공 공임의 가치는 끝없는 내리막길을 걸어온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봉제 일을 하고 산 44년 동안 이군표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안겨준 건 밤샘 노동이 아니라 대출을 끼고 샀다가 최근 수억원이 훌쩍 오른 아현동의 낡은 아파트다. “돈을 벌었으니 좋은 것인지, 그동안의 노동이 허무한 건지 헛갈리네요.”
청계노조 산울림회 회원 박원섭, 신항철이 평화시장 내 공장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사업주가 됐어요. 종업원은 아내…” 18살 때인 1987년 광주에서 상경해 청계천 주변에서 33년째 미싱을 돌리고 있는 51살 윤복기(가명)도 비슷한 처지다. ‘오야’가 25명, ‘시다’도 25명 있는 청계천의 한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1980년대 중반과 아내와 함께 가내수공업처럼 일하는 지금의 노동이 복사한 듯 그대로라고 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분신한 지 17년이 지난 때였지만, 윤복기도 함께 일하던 동료 ‘시다’ 24명도, 심지어 ‘오야’ 25명도 근로기준법을 몰랐다. 지금은 봉제인공제회에도 가입했고 근로기준법도 알지만,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질문에 그는 길게 침묵하다 이렇게 말했다. “긴 시간 노동하는 건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청계천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때 일했던 그 사람들이 지금도 똑같이 있어요. 일은 그때보다 더 하는 것 같아요. 바뀐 건, 지하에 있던 공장들이 지상으로 올라가고 좀 밝아지고 환풍기가 생겼지요. 대단한 노동권을 쟁취하기보다 그저 하루 사는 게 고역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한때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한국 산업 전체를 맨 앞에서 이끌던 때가 있었다. 전태일은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점이고, 청계피복노조는 빛나는 투쟁의 현존하는 역사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거대한 산업구조 변화의 뒤안길은 쓸쓸하기만 했다. 노동운동의 주류가 여공에서 대공장 남성 노동자로 변해가는 동안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퀴퀴한 공장에서 옷을 만들거나 눈길 닿지 않는 현장에서 불안정 노동을 하며 산다.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하며 40년 동안 미싱 앞을 지켜온 57살 최석호(가명)는 지난 50년을 돌아보는 질문에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운동 열심히 했죠. 임금 격차, 시간 격차, 계급 격차 이런 말 많이 하면서 조직화도 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노동운동이 여기 현실을 잘 몰라요.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은 절대 뭉칠 수 없어요. 5명도 안 되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투쟁을 해서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사업주랑 싸울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맨날 투쟁만 하자고 해요. 영세 공장 사업주들도 우리를 등쳐서 더 벌어먹는 게 아니라 생존이 안 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는 걸 나중에 안 거죠. 그러다 우리도 이젠 다 1~2인 공장 사업주가 됐어요. 종업원이 아내인 공장 말이에요.”
임현재씨, 정인숙씨, 도요한 신부, 이승철씨(왼쪽부터)가 청계피복지부 노조 사무실 현판 옆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노동자와 권리”라는 말의 설렘은 어디로… 윤복기는 전태일 50주기와 노동권 이야기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20여년 전 육아 이야기를 꺼냈다. 봉제공장 불빛이 꺼질 줄 모르던 그때, 창신동 놀이터(현 다산어린이공원)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노동자들의 공동 육아장 같았다. “엄마, 아빠가 불 켜진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수십명의 아이들이 창신동 놀이터에서 자기들끼리 어울려 놀았죠. 아직도 놀이터를 지날 때면 그때 생각이 나고, 맘이 흐려집니다. 육아, 이런 개념이 없어 아이들을 그냥 방치했던 거죠. 지금은 그래도 나라에서 (육아를) 책임져주려고 애는 쓰니까 헛산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김영순은 다른 이유로 1970년대 후반을 아련하게 기억한다. 잠옷 공장의 ‘시다’는 그때쯤 야학에서 “여러분은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무시받으면 안 되는 노동자입니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모든 노동자에게는 권리라는 것이 있다. 자기 권리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말도 마음에 박혔다. 전태일이 몸을 불태우며 부르짖던 그 말들이 시발점이 되어 ‘내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나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걸 배우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김영순은 아직도 맘이 설렌다고 했다. 하지만 청춘의 설렘은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시간 앞에 차츰 흐려졌다. 청계천 ‘시다’로 청계피복노조에 가입해 싸우던 그 미싱사들은 여전히 기계처럼 일한다. 존중받는 주인이 되지 못했다. 그가 몸을 태운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김완 김민제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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