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여성 미니어(가명·27)는 같이 일하던 동생 보파(가명·20·캄보디아)와 함께 경남 밀양의 농장을 떠나 경기 안산의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지구인의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은 지구인이 잠시 쉬는 곳이요, 다른 일터로 옮겨가기 위해 준비하는 곳이다. 미니어는 정류장에서 김 선생님(한국)을 만나 냉혹한 세상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고, 폰(가명·29·캄보디아)을 만나 미래를 준비하는 눈이 넓어진다.
한국 간다! 철없이 신났죠 내 고향 캄퐁참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차를 타고 북동쪽으로 3시간 정도 가면 닿게 되는 꽤 큰 도시예요. 메콩강을 끼고 있는 비옥한 땅이라 농사를 많이 지어요.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신 탓에 엄마가 우리 4남매를 키우려고 아등바등했어요. 엄마는 손바닥만한 밭에 고구마 농사를 지었지만, 워낙 규모가 작아서 돈이 되질 않았거든요. 먹고사는 게 매일 걱정이었죠. 자칫하면 셋이나 되는 동생들을 굶길 판이라 나는 열일곱살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집에서 가까운 공장에 들어가 몇년 다녔어요. 아무리 일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점점 지쳐가던 중에 고향 친구들 사이에 한국 바람이 불었어요.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대, 너도나도 들썩였지요. 나도 가볼까? 마음이 들떠서 별로 고민도 안 하고 바로 결심했어요. 가자, 가서 돈 벌자. 그런데 한국어 시험을 봐야 한대요. 그것도 점수가 높아야 빨리 계약할 수 있다지 뭐예요. 나는 결심이 물러지기 전에 한국어 학원이 있는 프놈펜으로 직장을 옮겼어요. 월세방을 얻어 살면서, 새벽 5시30분에 학원에 가서 1시간 공부하고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편직공장에서 일했어요. 한국어 시험은 200점 만점인데, 80점 이상 맞아야 해요. 제조업에 가고 싶었지만 높은 점수를 받을 자신이 없어서, 나는 커트라인이 좀 낮은 농업 분야에 신청했어요. 7개월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하고 4개월 뒤에 한 농장과 고용계약을 했어요. 한국아, 내가 간다! 철없이 신났었죠, 그때는. 엄마와 동생들도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로 모두 행복했어요. 자전거 갖는 게 소원인 아홉살 막내 동생은 내 주변을 뱅뱅 돌며 졸라 자전거 약속을 받아냈어요. 팔짝거리며 좋아하는 막내를 보며 나도 기뻤어요. 어디 자전거뿐인가요. 가족들이 무엇을 먹을지 걱정하는 일도 이제 없겠지요. 월급 받아서 꼭 필요한 만큼만 쓰고 다 엄마한테 보냈어요. 급한 불을 끈 엄마는 가족들이 편안하게 살 집을 짓자고 했어요. 우리 집터가 아주 작으니 정말 ‘작은 집’이죠. 돈을 보내면 조금 짓고 또 보내면 또 조금 짓고 그렇게 천천히 짓고 있어요. 다 지으려면 한동안 돈이 더 들어가야 해요. 내가 계약을 연장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해요. 얼마 전 동생한테 제보가 들어왔어요. 엄마가 돈을 조금이라도 불려보겠다고 동네 이모들한테 이잣돈을 빌려줬던가 봐요. 그랬다 돈 못 갚는 이모하고 엄마가 크게 다퉜다지 뭡니까. 그 돈이 무슨 돈인데! 우리 딸이 한국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이라고! 에구…. 엄마도 참….
가난한 애가 용감하기라도 해야죠 돈을 어떻게 모으고 그 돈으로 미래를 어찌 준비해야 할까요? 집을 짓고 이잣돈을 빌려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까요? 나는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번 돈을 어떻게 저축하고 활용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한국에 오기 전에는 일해서 동생들 먹이기만 바빴지, 돈을 모은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어요. 지금도 집 짓는 데 돈이 거의 다 들어갈 테니 미래를 준비할 돈은 아마 남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밀양 사장님이 그렇게 많은 임금을 떼먹었더란 말이죠. 미래를 생각하니 못 받은 돈이 더 아깝고 속상해요. 사장님이 내 미래를 훔쳐간 거예요! “퇴직금을 너무 적게 준 것 같다고 새로 계산해달랬지. 그 말에 사람이 돌변하더라!” 폰 언니가 일하던 농장을 그만두고 쉼터에 오게 된 이유였어요. 폰 언니는 3년+1년10개월 계약기간을 한번 마치고 ‘성실근로자’(재입국 특례 외국인근로자)로 다시 왔어요. 성실근로자는 4년10개월 동안 근무처를 한번도 안 옮긴 사람한테 주는 특별 기회래요. 나랑 보파는 이미 밀양 농장을 그만뒀으니 특별 기회 같은 것은 물 건너갔네요, 하고 중얼거리니 그렇지 않다고 김 선생님이 알려줬어요. 우리 사건이 임금체불과 불법파견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임금체불은 확정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불법파견은 이미 확인되었으니 사장님이 허락하지 않아도 고용센터 직권으로 회사를 옮길 수 있대요. 사장님의 불법행위 때문이니 우리도 ‘성실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해요. 이렇게 매정하고 무서운 한국에서 10년씩이나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지만, 나도 폰 언니처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해요. 다시, 폰 언니 이야기 할게요. 언니는 같은 농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일하다 전 근무기간의 퇴직금이 너무 적게 계산된 것을 알게 됐대요. 고용허가제 노동자의 퇴직금은 사업주가 ‘고용허가서’상 월평균 임금액의 8.3%를 ‘출국만기보험’이라는 이름으로 보험회사에 매달 적립하게 되어 있어요. 노동자는 집으로 돌아갈 때 ‘출국예정사실확인서’를 고용센터에서 발급받아 보험사에 제출해서 적립된 돈을 받게 되거든요. 엄청 복잡하죠. 그것도 퇴직금만 받고 계속 체류할까 봐 출국하는 공항에서만 지급한다니까요! 진짜 문제는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꾹 참고 절차를 거쳐 받게 되는 돈이 실제 받아야 할 퇴직금보다 훨씬 적다는 거예요. ‘고용허가서’에 적는 임금은 기본급이라 잔업, 야간, 주말특근 등이 포함된 실제 임금보다 적기 때문에, 기본급을 기준으로 계산해 적립한 ‘출국만기보험금’은 실제 받아야 할 퇴직금보다 매우 적어요. 그 차액을 회사가 주게 되어 있는데, 언니네 농장에서 그 사실을 숨겼던 거죠. 언니는 성실근로자로 다시 왔으니 뒤늦게라도 알고 차액을 요구할 수 있었지만, 다시 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못 받는다고 해요. 언니가 차액 지급을 요구하니 사장님이 불같이 화를 냈대요. “이년이 지랄하네!” 언니는 마음이 처참해지고 무서웠대요. 그때까지는 사장님과 괜찮은 관계 속에 일해왔던 터라, 언니가 느낀 배신감은 무척 컸던 것 같아요. 갈등을 겪다 농장을 나와서 고용노동청에 진정을 넣었대요. 정말 너무해요. 우리가 무슨 대단한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니잖아요. 법대로만 지켜달라는 건데, 사실 법도 우리 편이 아니잖아요. 이번에 일을 겪으면서 알아보니, 고용허가제법은 노동자 권리 따위는 다 무시하고 오로지 한국 사장님들만 좋도록 만든 법이었어요. 그런데 그것마저도 안 지키면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요! 밀양의 비닐하우스 6동에서 새장에 갇힌 새처럼 지내온 나에 비하면, 그래도 폰 언니는 세상을 좀 넓게 산 것 같아요. 언니는 비닐하우스가 90동이나 되는 경기도 포천 농장에서 일했대요. 같이 일하는 이주노동자들도 10명 정도 됐다고 해요. 언니네 8남매 중에 넷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어서 가끔은 뭉쳐서 모임도 한대요. 다들 자기 직장에 매여 있으니 자유롭진 않겠지만 그래도 서로 의지되고 얼마나 좋을까요. 가장 부러웠던 것은 4남매가 각각 2만달러씩 부모님에게 드리기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다 지켰다는 거예요. 그 외에는 자신을 위해 저축하고 앞날을 준비하기로 했다고요. 그럴 수도 있는 거구나! 정말 놀라웠어요. 언니는 밭을 사서 캐슈너트 묘목을 심었대요. 계약을 마치고 돌아가서 캐슈너트 농장을 운영할 거래요. “캐슈너트 농장?” “지금은 밭이 작아. 돈 버는 대로 조금씩 넓히려고.” 눈이 동그래진 나에게 언니는 어린 캐슈너트 나무가 가득 심긴 너른 밭을 보여줬어요. 3년 뒤에는 캐슈너트를 수확할 수 있대요. 폰 언니가 부러웠어요. 나도 뭔가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솟았어요. 보파도 캐슈너트에 홀려 대화에 끼어들었어요. 보파는 열아홉살에 한국에 왔어요. 이렇게 먼 나라까지 오기 무섭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동생이 그래요. “나처럼 가난한 애가 용감하기라도 해야죠. 겁나고 무서운 거 다 따지면 가족을 도울 수 없잖아요.” 이처럼 당찬 아이한테 밀양 사장님은 깻잎을 더 따라고 모진 소리를 얼마나 해댔는지 몰라요.
갈 곳은 또 다른 호랑이 굴뿐이라니 보파와 나는 김 선생님과 함께 양산노동지청에 2차 출석을 했어요. 사장님 대신 사위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또 거짓말을 해요. 밥도 쫓기듯 먹고 화장실도 못 갈 지경으로 깻잎 더 따라고 쪼아대더니, 우리에게 쉬는 시간을 충분히 줬으니 그 시간은 빼고 계산해야 한다고 억지였어요. 노동청은 일한 시간에 대한 의견이 달라서 더 조사해야 우리가 못 받은 임금이 얼마인지 결정할 수 있다고 했어요. 노동청이 체불임금액을 정한 뒤에도 사장님이 끝까지 돈을 안 주면, 노동청에서 ‘체불임금확인원’을 받아 민사소송을 해야 한다고 김 선생님이 설명해줬어요. 만약에 사장님에게 재산이 없으면 우리가 민사소송에서 이긴다 해도 한푼도 못 받게 될 수도 있대요. 돈을 정말 받을 수 있기는 한 건지, 언제쯤 받을 수 있을지, 못 받으면 소송을 할 수 있을지, 소송한다고 받게 될지, 모든 것이 다 한숨입니다. 좀 더 빨리 농장을 떠났더라면 어땠을까, 못 받은 돈이 이렇게까지 많아지지 않았겠지. 사정을 해서라도 사장님에게 100만원을 주고 놓여날 것을 그랬어. 만약 견디지 못하고 농장을 뛰쳐나왔으면 어땠을까. 순식간에 비자 없는 사람이 되어 매일매일 쫓기는 마음으로 살고 있겠지, 아니 그런데, 잘못은 사장님이 했는데 왜 내가 쫓겨야 하는 거죠?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도 큰 문제예요. 고용센터에 구직등록을 하고 석달 내에 직장을 구해야 하는데, 겨울이 오고 있잖아요. 농장들이 겨울에는 있는 노동자도 내보내는데, 일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농장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도 않다고 해요. 농장 사장님들이 임금을 덜 주려고 하나같이 일한 시간을 속인대요. 호랑이 굴에서 도망 나왔지만, 결국 또 들어갈 곳은 다른 호랑이 굴뿐이라고, 김 선생님이 마음 아파했어요. 슬픈 마음을 다독이려고 ‘한국에서 일을 마친 뒤 무엇을 하며 살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봤어요. 폰 언니처럼 농장을 해볼까, 땅을 사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겠지. 손바닥만한 엄마 고구마밭은 캐슈너트 나무 열그루나 심을 수 있을까, 쯧쯧 너무 작아. 요즘 캄보디아에 카페가 많아지고 있으니 나도 카페를 해볼까? 건물에 자리를 얻어 카페를 내기에는 돈이 부족하겠지? 우리 말로 똡카페라고 부르는 부스 형태의 카페가 어떨까? 폰 언니에게 상의하니, 좋은 생각이라고 응원해줬어요. 그러고 보니 카페 천국이라 할 한국에 있으면서도 그 흔한 데를 한번도 안 가봤네요. 나는 큰맘 먹고 폰 언니와 함께 카페에 들어가봤어요. 메뉴를 보고 한참 고민했어요. 무슨 커피와 차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 마실 것을 고르기가 힘들었어요. 주인 눈치를 살피며 메뉴판을 샅샅이 훑다가 아는 것을 하나 찾아냈어요. 자몽 있다, 자몽! 한국 사람들은 주로 커피를 많이 마시나 봐요. 우리 캄보디아 사람들은 차를 좋아하죠. 직접 카페에 와보니 나도 카페를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이런 걸 ‘꿈’이라고 하나요? 그래, 깻잎 딴 돈 받아 내서 그 돈으로 나도 카페 열어보자, 내 꿈은 내가 지켜야지! 나는 따뜻한 차를 손바닥으로 감싸며 비장하게 다짐했어요.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일꾼. 국경을 넘어와 새 삶을 꾸리고 있는 이주민들은 저마다 깊은 사연이 있다. 떠나온 사회와 살아내야 할 사회에 하고픈 말이 많지만 그 말은 발화되지 못한 채 눈동자에 잠기곤 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내 당사자 시점으로 전한다. 4주에 한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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